이번 소울레터는 생활전문신문 '교차로'와 함께 청각장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청각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진행한 제2회 수기 공모전 수상작을 담았습니다.
'청각장애인으로서의 나의 삶' / '청각장애와 관련된 경험담'을 주제로 진행한 공모전을 통해 전해진 마음을 울리는 따뜻한 이야기. 님에게 전합니다.
수기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I love me>
토닥토닥 아이 엉덩이 토닥이는 소리, 쌔근쌔근 잠자는 아이 숨소리... 인공와우가 나에게 준 ‘선물’입니다. 사라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 인공와우가 나에게 준 ‘일상’입니다. 도움없이 혼자 처리하는 업무 전화, 퇴근길 차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웃는 미소... 인공와우가 나에게 준 ‘새로운 인생’입니다.
인공와우가 내 귀가 된 지 1209일이 되었다.카카오톡 프로필에 나의 디데이 달력은 인공와우 기기 첫 부착을 의미하는 ‘switch on’. 그리고 순차 양이 수술을 한 ‘second switch on’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나의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일상이 무료하거나 크고 작은 일들로 힘이 들 때마다 현재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고자 디데이 날짜를 확인해보곤 한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우연히 난청을 알아차리고 중학생이 되어서 보청기를 착용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워 작은 귓속형 보청기를 끼고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리고 다니며 주변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쏟았다. 친구들의 말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전전긍긍했고 시끄러운 교실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토끼처럼 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한순간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고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불안을 적절히 다룰 수가 없어 외롭고 거칠고 힘겨운 사춘기를 겪어야 했다.
20대에도 여전히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청각장애인을 고용하는 일자리는 없는지 구인광고를 찾아보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특수교육과에 입학하여 특수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속기사의 도움을 받아 수업을 듣고 농인 친구들을 만나 수화를 배우고 시각장애인 멘토를 만나 점자를 배우며 비장애인과 장애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내 정체성이 조금씩 ‘장애인’ 쪽으로 굳어갔다.
30대가 되어 청력은 점점 더 나빠졌고 더 이상 보청기 도움조차 받을 수 없게 되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소리없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나 예쁜 아이들을 낳았지만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는 것부터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어느 한 날에 있었던 일이다. 화재경보기가 한참 울리더니 얼마 후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아파트 7층에 살고 있던 나는 걷지도 못하는 돌쟁이 아이를 안고 무작정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다. 시큰한 발목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1층에 도착했을 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피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아파트 밖에는 나와 아이 단둘뿐이었다. 경비실로 가서 물으니 오작동이었단다. 내가 듣지 못한 건 오작동 안내방송이었던 것이다. 허탈하고 화가 났다. 듣지 못해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서러움과 무력감, 우울감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다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들과 나를 지켜주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는 전화도 받지 못하고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으며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는 물속에서 뻐끔거리는 물고기와 같았고 나는 홀로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되었다.
어느 날 문득 인공와우 수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와우는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었지만 ‘그래봤자 기계인데 얼마나 잘 들리겠어?’라고 의심하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로 인해 입 모양을 볼 수 없었던 상황은 더욱 청각장애인을 고립시켰고 이제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인공와우를 떠올렸던 것이다.
대학병원 교수님과 상담을 통해 수술을 결정하고 나서도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100dB을 30dB 이상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후를 들었지만 20년간 내가 살아온 조용한 세상이 수술 한 번으로 그렇게 쉽게 바뀐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2020년 8월.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좌측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몇 번의 맵핑 과정을 거치며 인공와우에 적응해 나갔다. 처음 남편의 말소리가 들리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인공와우 첫 착용 후 17일째 되던 날이었다. 남편과 어두운 저녁 동네 산책을 하며 ‘내일 뭐 할까?’ 묻던 남편에게 ‘음~ 뭐하지?’ 되묻던 내 모습에 남편은 사뭇 놀란 표정이었다.
보통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응? 뭐?’라고 되물으며 입 모양을 보아야 원활한 대화가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말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인 ‘음소’ 하나 하나에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유튜브를 듣고, 온라인 강의를 찾아 듣고, 전자책을 듣고, 노래를 듣고... 24시간 듣고 또 들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귀로 듣고 이해하는 과정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점점 나의 귀는 열렸고 나는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었다. 업무 중 모니터를 보며 직장 동료와 의견을 나눌 수 있었고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할 수가 있었다. 라디오를 듣고 문자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었고 뜨개질을 하며 친구와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 이상 나의 눈이 사람 입 모양에만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좌측 인공와우로 놀라운 세상을 경험한 후 나는 나머지 우측 인공와우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편측 인공와우로는 부족했던 부분이 있어서 조금 더 잘 듣고 싶은 욕심에 망설임없이 양측 인공와우를 결심했다. 하지만 성인은 양측 인공와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2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이 있고 준비된 보험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고민없이 결정하였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인공와우 수술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수술은 아닌 것 같다. 귀가 들리지 않아 파생되는 개인적, 사회적 손실을 생각하면 인공와우 수술의 전면 급여 적용과 인공와우 기기 비용 부담 절감 등 제도의 개편이 절실하다. 나는 인공와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나서 주변의 현실이 눈에 보였고 많은 이들이 인공와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길 소망하며 사랑의달팽이를 통해 적게나마 매달 후원하고 있다.
인공와우 3살. 와우와 함께 새로 태어난지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소리였는데 참으로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음소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너무 많은 소리들로 피로해질 때가 있다. 듣고 싶지 않은 소문, 속을 알 수 없는 대화, 무시로 들려오는 소음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 ‘달팽이관’을 빼놓고 조용히 마음의 소리를 들어본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오랫동안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내 마음의 소리는 그동안 쉼 없이 재잘거렸으며 나는 너의 모든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고... 힘들 때나 슬플 때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너와 나는 최고의 친구였고 단짝이었다고... I love Me!